시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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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물은 외력보다 내력이 세야 돼.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 나의 아저씨

조롱의 대상에서 존경의 인물로

한 노파가 아테네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 근처에서 디오게네스가 땅바닥에 앉아 콩을 씹고 있었다. 지나가던 플라톤의 제자 하나가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왕에게 아첨할 줄만 알았더라면 콩 같은 걸 먹고 살지 않아도 될 텐데요.” 디오게네스는 눈도 들지 않고 답했다. “당신이 콩 먹는 법을 배웠더라면 왕에게 아첨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그 제자는 크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2400년이 지난 지금,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 조용히 판결을 내렸다. 그 제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콩을 씹던 그 남자의 이름은 철학사에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비정상이라는 낙인의 작동 방식

한 시대가 누군가를 비정상이라 부를 때,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대의 기준이 그 사람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야기 한 것처럼 디오게네스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옷도 걸치지 않은 채 광장을 돌아다니고, 명망 높은 철학자들과 논쟁하며 그들을 비웃고, 통치자를 경배하지 않았다.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분명 비정상이었다.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렇다. 사회가 공유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이 나타난다. 다수는 그 이탈을 위협으로 느낀다. 그래서 웃거나, 무시하거나, 배척한다. 이 반응이 집단의 기준을 수호하는 알레르기 반응이 된다. 비웃음은 일탈에 대한 사회적 항체다. 문제는 이 항체가 때로 진짜 독소가 아닌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공한다는 것이다.

조롱받은 자들의 명단

역사를 살펴보면, 후대에 존경받는 인물들이 생전에 얼마나 하찮은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갈릴레이는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다가 종교 재판에 끌려갔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에 판 그림은 단 한 점이다. 19세기 중반, 헝가리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이그나즈 제멜바이스는 의사들이 손을 씻어야 산모 사망률이 줄어든다고 주장했다가 동료 의사들에게 조롱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우리들 교육받는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더 무지한 경우가 있다. 기존 체계 안에서 너무 오래 훈련된 사람들은 그 체계의 한계를 보지 못한다. 조르바 같은 ‘비정상’적 인물이 때로 본질을 더 정확하게 꿰뚫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개는 왜 조롱받지 않는가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디오게네스와 장자는 조롱받았다. 하지만 개는 조롱받지 않는다. 왜일까?

개도 사회적 규범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체면을 차리지 않고, 허례허식을 모르며,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그런데 개는 조롱받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받는다. 그 이유는 개가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는 그냥 존재한다. 누군가의 기준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협이 되지 않는다.

디오게네스와 장자가 조롱받은 것은 그들의 존재 방식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 방식으로 기존 사회를 향해 조용하지만 강력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 정말 옳은가?” 이 질문이 기득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편해진 사람들은 비웃는다.

시간이라는 가장 공정한 심판자

비웃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응답은 반박이 아니다. 지속이다.

디오게네스는 비웃음에 비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방식이었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냥 살았다.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계속 존재했다. 장자도 마찬가지였다. 주류 사회의 평가에 응답하는 대신 더 깊이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켰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 옳았는지 드러난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제멜바이스를 비웃던 의사들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기억된다. 반 고흐를 외면했던 갤러리 주인들의 이름은 사라졌다. 하지만 반 고흐의 그림은 남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구조기술사인 박동훈(이선균 분)이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건물의 구조와 인생을 비유하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모든 건물은 외력보다 내력이 세야 돼.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조롱은 외력이다. 그것이 아무리 강해도, 내력이 더 강한 사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디오게네스의 내력은 2400년의 세월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게 했다. 장자의 내력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

시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후대가 이해한다

장자는 혜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알 수 있소?” 이 물음이 담긴 《장자》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주류 사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나 중국 사상의 근간이 되었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에서 읽힌다.

왜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이해하게 되는가? 시대가 바뀌면 기준이 바뀌기 때문이다. 기준이 바뀌면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사람들은 깨닫는다. 우리가 조롱했던 그 사람이 사실은 우리보다 먼저 본 것이 있었다고.

디오게네스가 아테네 광장에서 등불을 들고 “진짜 인간을 찾는다”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안다. 가식 없이, 포장 없이, 자신으로 사는 사람. 그것이 얼마나 드문지를.

현대의 비정상들에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어딘가에서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주변의 기대와 다른 길을 선택했거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의문을 품었거나, 남들이 가는 방향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거나…

그 비정상이 불편하고 외로울 수 있다. 조롱이 상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달과 6펜스》의 한 구절이다.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시대가 아니라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다르게 평가받았을 사람들. 혹은 지금 이 시대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사람들. 그 불일치가 결함이 아닐 수 있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인 진실일 수 있다.

디오게네스와 장자가 조롱의 대상에서 존경의 인물이 된 것은 그들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그들을 이제서야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조롱받더라도, 개처럼, 장자처럼, 디오게네스처럼, 자신의 방식으로 계속 존재하는 것. 모두가 잊더라도 시간은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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